전등사()


※ 전등사
포스트는 바로 앞의 포스트와 연결됩니다. 전등사대웅전은 오랜세월의 흔적 그대로 가지고 있는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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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전

안개속 대웅전의 모습은 신비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종목  보물 제 178 호
수량  1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시대  조선시대







아래는 전등사 대웅전에 대한 안내문이다.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보물 제 178 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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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전 안내문




대웅전 옆에는 전등사 약사전(傳燈寺藥師殿)이 있다. 약사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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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약사전

종목  보물 제179호
수량  1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시대  조선시대











대웅전 옆에는 전등사 범종(傳燈寺梵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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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범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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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범종 2

















아래는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에 대한 안내문이다.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보물 제 393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중국 송(宋)나라 때(1097) 회주(懷州) 숭명사(崇明寺)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富平)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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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범종 안내문




범종 바로 옆에는 아래 사진처럼 부조로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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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조각상?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안내문 원본 및 편집, 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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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 전등사 가는 길
이른 아침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안개속 전등사로 가는 길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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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가는 길




첫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삼랑성(三郞城)이다. 성벽을 쌓은 모양이 일반적인 성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내문을 보니 원래 토성 이었으나 겉부분에 막돌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쌓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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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三郞城)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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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三郞城) 성벽

















아래는 삼랑성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삼랑성(三郞城)

사적 제130 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는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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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三郞城) 안내문




삼랑성을 지나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양헌수 승전비'이다. 강화도 일대를 돌면서 느낀 것은 병인양요가 강화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양헌수 장군에 대한 기념비들이 많으며 강화도를 이야기할 때 병인양요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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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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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안내문









 







아래는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기념물 제36호
소재지 : 길상면 온수리 산 42번지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르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에는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을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높이가 181cm, 비신의 높이가 163cm, 너비 60cm, 두께가 27cm이다.
 

 
승전비를 지나 조금 지나면 도착하면 전등사 윤장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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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는 월정사(월정사 윤장대)에서도 볼 수 있다. 월정사 나의 포스트에 사진을 올려놓았다. 형태는 거의 비슷하나 보관장소가 차이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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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윤장대 안내문

















※ 전등사
안개낀 전등사는 매우 아름다웠다. 옥의 티라면 '조선일보를 규탄한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감상에 방해를 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나의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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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전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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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전경 2




아래 동영상은 전등사 풍경을 촬영한 것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삼랑성 안내문, 양헌수 승전비 안내문, 전등사 윤장대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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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廣城堡)


광성보에 대한 마직막 포스트이다. 광성보 입구 바로 옆에서는 아래 그림과 같은 광성돈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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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돈대(廣城燉臺)

내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 자세한 설명을 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무튼 이곳은 당시 사용한 다양한 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사용한 포들일 것이다.
흙을 쌓아 만든 벽사이 사이에는 이러한 포를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곳곳에 나 있다.









아래는 광성돈대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광성돈대(廣城燉臺)

  광성돈대는 광성보(廣城堡)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肅宗) 5년(1679) 함경도(咸鏡道)·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砲座) 4개소와 포 3문(門)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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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돈대 안내문




아래는 광성돈대를 촬영한 것이다.







이 아래부터는 광성돈대에 전시된 포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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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불량기 모습

아래는 불량기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불랑기(佛狼機)
구경 : 26m/m
길이 : 78.2cm
중량 : 38kg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 개에서 아홉개의 자포(子砲)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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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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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기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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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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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소포 모습

아래는 소포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소포(小砲)

구경 : 84m/m
길이 : 119cm
중량 : 171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화포중 가장 발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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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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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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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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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측면 1

아래는 홍이포에 관한 안내문을 옮긴 것이다.  
홍 이 포(紅夷砲)

구 경 : 100 mm 
길 이 : 215 cm 
중 량 : 1,800 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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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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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측면 2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광성돈대에 대한 안내문과 불랑기에 대한 안내문, 소포에 대한 안내문, 홍이포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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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포대를 지나 조금 지나면 용두돈대가 나타난다. 쌓여진 성벽사이로 강화 앞바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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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龍頭墩臺)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닷물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서해바다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고 하고 넓은 지역에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빠진다고 하지만 사실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처음 바닷물이 이동하는 속도를 보니 강물이 흐르는 것으로 착각이 든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 참조한다.











아래는 용두돈대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이 돈대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지키던 천연 요새(要塞)로서 조선 숙종(朝鮮 肅宗) 5년(1679)에 축조되었다. 병인(丙寅).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치열한 포격전(砲擊戰)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1977년 성벽(城璧)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江華 戰蹟地)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비의 전면(前面)의 글씨는 박정희 전대통령(朴正熙 前大統領)의 친필이며 후면의 비문은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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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 안내문




성벽을 지나면서 몇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밖을 볼 수 있는 구멍이 나있는데 하나는 정면을 향하고, 하나는 아래를 향하여 구멍이 나왔다. 아마 이 구멍을 통해 적을 관찰하거나 총이나 화살을 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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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을 관측할 수 있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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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아래를 관측할 수 있는 형태


















성벽위에서 보는 해안가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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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에서 바라본 해안가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로 성벽을 따라 가면 끝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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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옆에 있는 '홍이포' 전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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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옆에 있는 홍이포 전시물




광성보 입구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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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돌아오는 길에서 보는 광성보 입구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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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용두돈대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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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진들과 이야기 때문에 3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광성보를 찾았을때 마침 안개가 끼어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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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잠깐이면 다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주변이 매우 넓어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살펴보아야만 했다.
광성보의 커다란 문을 지나 길을 따라가 보면 해안가로 둘려쌓여 보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종 목  사적 제 227호(성)
면 적  면적 6.1ha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조선 후기 신미양요가 이곳에서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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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성벽

  항상 아이들에게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가르치면서 과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왜 강화도에서 유난히 수많은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강화도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 이곳의 중요성을 우리 조상들은 옛부터 알고 수많은 포를 배치하고 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아래는 광성보 안내도를 옮겨놓은 것이다.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 227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한 강호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숙종 5년(1679)에 강호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이 보에 딸린 화도돈, 오두돈, 광성돈을 함께 축조하여 이를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 미국 군대와 48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 영령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을 1977년에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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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안내문




아래 동영상은 광성보 입구 풍경을 촬영한 것이다.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면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장군과 59명을 기리기 위한 쌍충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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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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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


 
 
 
 
 
 
 
 
 
 
 




아래는 쌍충비 안내문를 옮겨놓은 것이다.
쌍충비(雙忠碑)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호군 불은면 덕성리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1826-1871)순절비인데 폭이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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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 안내문




쌍충비를 지나 용두돈대(龍頭墩臺)로 가는 길 중간에 광성포대가 나타나게 되는데 광성포대 역시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해안시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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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포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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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포대 내부

















아래는 광성포대 안내문를 옮겨놓은 것이다.
광 성 포 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호군 불은면 덕성리 산123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1675-1725)은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1874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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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포대 안내문




아래 동영상은 광성포대를 촬영한 것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광성보에 대한 안내문, 쌍충비에 대한 안내문, 광성포대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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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草芝鎭)



강화도는 처음 가보는 곳이다. 섬이라 하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볼거리도 많았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중요한 강화도에 도착해서 처음 가본 곳이 바로 초지진이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초지진 주변에 전에는 거의 바다였지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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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바깥 모습

또한 초지진은 강화도를 둘러싸고 있는 진들중에 일부이며 수많은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인상적인 것은 초지진 벽옆으로 소나무 2그루(옆의 사진에 보면 조금 보이는 소나무)가 있는데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고 우리 조상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곳이라 할 수 있다. 

종 목  사적 제225호(진)
면 적  면적 4,233㎡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아래는 초지진 안내도와 설명 자료를 옮겨놓은 것이다.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 225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朝鮮) 효종(孝宗)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그 뒤 고종(高宗) 3년(1866) 10월 천주교(天主敎)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로즈의 극동함대(極東艦隊)와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通商)을 강요하여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및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雲楊號)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진(激戰地)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및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사거리(射距離)도 짧고 정조준(正照準)도 잘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江華島修好條約)의 체결을 가져옴으로써 일본 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 진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簽節制使) 1일,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戰船) 3척이 주둔하였었다.
   이 곳은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기에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大砲)를 진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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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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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설명













 



초진진 밖에서 보는 모습으로 사이 사이에 적을 관찰하거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돌이 쌓이 모습으로 보아 제법 튼튼하게 쌓여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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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바깥 모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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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바깥 모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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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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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포 보관 장소



바로 위의 사진 건물 안에는 홍이포를 전시하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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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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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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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후면

아래는 홍이포에 관한 안내문을 옮긴 것이다.  
홍 이 포(紅夷砲)

구 경 : 100 mm 
길 이 : 215 cm 
중 량 : 1,800 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아쉬운 점은 그 당시 우리가 사용하던 포탄이 폭발하지 못하는 종류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임진왜란때 적군의 배에 구멍을 내어 침몰시킬 수는 있었어도 그 당시 쇠로 만들었던 함선에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초지진에 대한 안내문과 홍이포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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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지동봉가옥(平昌 智東鳳家屋)


평창시내를 벗어나 영월, 제천으로 가는 국도(31번)를 따라 가면 유동리를 지나 천동리에 도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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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지동봉가옥

한국전통불한증막으로 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이길을 따라 5분쯤 가면 '평창 지동봉가옥'이 나타난다.
실제로 이 가옥에는 이 집 주인이 살고 있었다. 촬영허가를 얻어 몇군데를 촬영하였는데 마침 수리중이라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74호
분 류  고  가
소재지 평창군 평창읍 천동리 295







아래는 평창 지동봉가옥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평창 지동봉가옥(平昌 智東鳳家屋)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74호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천둥리

  이 가옥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1941년에 만들어진 기와가 남아 있다. 지동봉의 증조부가 분가하여 이 곳에 집을 지은 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졌으며 안채는 대청마루 2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아랫사랑, 윗사랑이 있고 우측에 뒷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마루가 있는 안방에 직각되게 부엌이 붙어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 배치를 하고 있다.
  행랑채는 대청과 마주보게 광, 대문간, 행랑방과 마구간, 디딜방아간으로 구성되어 'ㅡ'자로 놓여 있다.
  팔작기와지붕의 안채 주위 마당에는 작은 정원을 갖추고 있다
. 영서지방의 건축 형식과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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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지동봉가옥 안내문




외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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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봉가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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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봉가옥 측면 1

 
 
 
 
 











내부 풍경이다.(포토샵으로 약간 편집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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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봉가옥 내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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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봉가옥 내부 2


 
 
 
 
 
 
 
 
 
 
 



 
외부에서 본 지동봉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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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봉가옥 측면 2


 

지동봉가옥 내부 동영상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평창 지동봉가옥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
평창 노성산성(平昌 魯城山城)


장평을 지나 31번 국도를 통해 약 30분 정도 가면 평창군청이 있는 평창읍에 들어선다. 읍내로 가는 바로전에 삼거리가 나타난다. 왼쪽으로 가면 읍내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읍내를 비롯한 평창문화예술회관으로 가게 된다. 삼거리 지점에서 읍내로 조금 더 들어가면 잠시후 노성산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더욱이 가는 방향에 반대편에 있으므로 U턴하여 돌아가야 한다. 아무튼 아파트 바로 옆에 경사가 매우 급한 길이 나오는데 이길을 따라가면 산성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은 산성뿐만 아니라 현충탑과 노성정(궁도장)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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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노성전적비(壬辰魯城戰績碑) 주변

산성이라 하여 그 형태를 분명하게 볼 수는 없다. 다만 아래 사진들 처럼 조금씩 흔적만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과 토기등을 고려할 때 고려후기부터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후 몇번의 보수가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때 평창군수 권두문공이 왜적과 싸운 기록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노성산성지 안내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종목  강원도 기념물 제80호(성곽)
둘레  약 517m
소재지  강원도평창군 평창읍 하리
 산1 및 중리 산 10일원



산성을 올라가는 길은 비교적 가파른 편이다. 차량을 이용하면 임진노성전적비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다. 오른쪽 그림은 전적비로 가는 계단으로 경사가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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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성 가는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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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성 가는 길 2

















아래는 임진노성전적비(壬辰魯城戰績碑)로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을 후세에 알리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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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노성전적비



아래는 노성산성지에 대한 안내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곳은 조선조(朝鮮朝) 중기 흉폭한 왜적(倭賊)의 침입이 있었을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조상들이 피흘려 싸운 곳이다.
이것에 처음 성을 샇은 것은 조선 중기라 하나 성을 쌓은 모양으로 보아 그 보다 더 오래인 고려시대 이전에 이 고장을 지키려는 선민들이 쌓은 산성이라고 보는편이 옳은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공이 이 산성을 수축하고 전란에 대비한바 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관민이 함께 피난했던 응암굴이 있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400여미터의 작은 산성이나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수축한 산성이다. 이 고장을 지켜온
호국의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자 표석을 세워 옛일을 후세에 전한다.

1984. 10. 7. 평창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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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성지 안내문



경사가 있는 부분으로 가면 돌로 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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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흔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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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흔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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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흔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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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흔적 3

















노성산성에서 바라본 평창읍내이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아래 동영상을 클릭하면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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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성에서 바라본 평창군



아래는 동영상은 노성산성과 그 주변을 촬영한 내용이다. 멀리 평창군이 보인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노성산성지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편집, 나의 경험
:
대관령 성황사(城隍祠)와 산신각(山神閣)


대관령 양때목장에서 선장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성황사와 산신각으로 가는 작은 길목이 나오는데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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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가는길

길을 따라 약 10분정도 가게 되면 비교적 큰 주차장이 나타나는데 바로 위에 성황사와 산신각을 볼 수 있다.
양때목장을 관람하고 잠시 시간을 내어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가는 길목이 좁아 속도를 줄여 천천히 이동해야 한다.
내가 찾아갔을때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진지한 마음으로 절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촬영을 하였고 임시로 친 천막으로 인해 사진촬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래 사진들은 포토샵을 이용하여 편집한 것이라 약간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최대한 정밀하게 편집하였으므로 형태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 대관령 산신각(山神閣)
대관령 산신각은 대관령의 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귀신의 도움으로 신검을 정벌하는데 성공하여 세운 사당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을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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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신당이라 규모가 작고 안에는 산신도가 그려져 있다.
신단에는 제를 올리기 위해 사용된 음식들이 놓여 있다.




종목  강원도 기념물 제54호
수량  2
소재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14-256




아래는 대관령 성황사와 산신각의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당은 영동지역의 가뭄, 홍수, 폭풍, 질병, 풍작, 풍어 등을 보살펴 주는 영험한 신을 모신 사당이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인 강릉 단오제가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성황사에는 신라 말기의 고승인 강릉 출신의 범일국사를 모셨다고 한다. 산신당은 대관령의 산신을 모신 곳인데, 강릉의 옛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의하면 장군 왕순식(王順式)이 고려 태조를 모시고 신검(神劍)을 정벌하려고 전쟁을 치려고 할 때, 꿈에 두 귀신이 구해 주어서 이겼다고 한다. 그 후 두 분을 산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전하지만, 현재 사당에는 일반적인 산신도 형식의 탱화를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4월 1일이면 이 곳에서 제사를 오리고 4월 15일에는 이 곳 서낭사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굿놀이를 한다. 신들의 노여움을 풀고 복을 내려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굿을 할 때 무당이 신이 내린 것으로 선정된 나무인 신간목(神竿木)을 강릉시 홍제동여서낭당까지 모시고 가서 서낭 부부를 함께 만나게 한 후 5일간 제사를 올린다. 이 축제 때 풍어제를 비롯하여 풍년제, 관노가면극 등의 민속놀이가 행해지며, 마지막 날에는 시간목에 불을 붙이고 정성을 들여 합장하여 절을 하며 서낭께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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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성황사와 산신각에 대한 안내문



산신각 안의 산신도로 호랑이와 산신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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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산신도




※ 대관령 성황사(城隍祠)
산신각 바로 옆 조금 아래에는 성황사를 볼 수 있다. 크기는 눈으로 확인할 때 산신각의 약 2배 정도의 되는 규모이고 그 안에는 신라 말기의 고승인 범일국사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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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사

성황당과 산신각에 있는 각각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같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몇가지 차이가 있다. 차이점은 사진을 클릭하여 확인하기 바란다. 아이들의 경우 산신도의 색이나 그림이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같은 종류로 착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랑이가 그림이 나와 있다는 점이 비슷하지만 얼굴모양, 의복, 배경, 호랑이의 수, 선녀처럼 보이는 또 다른 인물들이 완전히 다른점이다. 하지만 난 순간적으로 왜 비슷하게 생각했을까?








대관령 성황사는 범일 국사와 관계가 있는데 범일국사의 탄생신화 이야기를 찾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마을에 살았던 한 처녀가 석천이란 우물에서 물을 기르기 위해 갔다. 물을 마시기 위해 물 한바가지를 뜨자 그 속에 해가 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 물을 마셨다. 그후 태기가 있어 13달만에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범일 국사이다.
   이 때문에 결국 어머니는 아이(범일국사)를 산에 버렸지만 몇일 후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짐승(학)의 도움으로 살아있게 되었고 어머니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다시 데려다 기르게 되었다. 매우 총명한 그는 15살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된 후 득도를 위해 중국으로 갔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굴산사를 세웠다. 그후 대관령으로 돌아가 산신령이 되었다.


아래 사진은 성황사 내부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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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사 내부



아래 건물은 성황사와 산신각 옆의 건물인데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나에게는 아름답게 보여 올려본다. 아시는 분은 댓글을 통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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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물일까요?

 


아래는 동영상으로 보는 산신각과 성황사에 대한 풍경이다.



아래는 동영상은 주차장에서 촬영한 산신각과 성황사 주변에 대한 풍경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대관령 성황사(城隍祠)와 산신각 (山神閣) 안내문 원본 및 편집, 나의 경험
: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고 있는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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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동종


경주에 있는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어 신라시대 범종 2구 중 하나이며, 윗 부분 동종을 매달고 있는 부분에는 용이 발톱으로 잡고 있는 형상을 띄고 있다. 또한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동종 몸통의 윗부분은 마치 연꽃모양처럼 생긴 부분이 9개씩 4군데에 걸쳐 둘려 쌓여 있다.
동종의 가운데 부분은 구슬과 연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부분이 종을 치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그 옆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겨져 있다.


종목  국보 36 호
소재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상원사
시대 통일신라시대



상원사 동종의 머리 부분은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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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동종 머리 부분



상원사 동종을 보관하고 있는 상원사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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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범종각




사진출처 : 본인
글 출처   : 문화재청 정보 편집과 본인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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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컴퓨터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S/W, H/W)를 소개합니다. 웹 2.0의 환경적 특징에 관심이 많으며 많은 분들과 공유를 원합니다. by 네임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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