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 전등사
포스트는 바로 앞의 포스트와 연결됩니다. 전등사대웅전은 오랜세월의 흔적 그대로 가지고 있는듯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대웅전

안개속 대웅전의 모습은 신비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종목  보물 제 178 호
수량  1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시대  조선시대







아래는 전등사 대웅전에 대한 안내문이다.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보물 제 178 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대웅전 안내문




대웅전 옆에는 전등사 약사전(傳燈寺藥師殿)이 있다. 약사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약사전

종목  보물 제179호
수량  1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시대  조선시대











대웅전 옆에는 전등사 범종(傳燈寺梵鐘)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범종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범종 2

















아래는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에 대한 안내문이다.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보물 제 393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중국 송(宋)나라 때(1097) 회주(懷州) 숭명사(崇明寺)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富平)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범종 안내문




범종 바로 옆에는 아래 사진처럼 부조로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무 조각상?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안내문 원본 및 편집, 나의 경험

'문화재 > 강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傳燈寺) 1/2  (0) 2007.12.01
광성보(廣城堡) 3/3  (0) 2007.11.20
광성보(廣城堡) 2/3  (0) 2007.11.17
광성보(廣城堡) 1/3  (0) 2007.11.13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0) 2007.11.06
:
전등사()


※ 전등사 가는 길
이른 아침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안개속 전등사로 가는 길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가는 길




첫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삼랑성(三郞城)이다. 성벽을 쌓은 모양이 일반적인 성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내문을 보니 원래 토성 이었으나 겉부분에 막돌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쌓은 것이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랑성(三郞城) 입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랑성(三郞城) 성벽

















아래는 삼랑성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삼랑성(三郞城)

사적 제130 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1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는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랑성(三郞城) 안내문




삼랑성을 지나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양헌수 승전비'이다. 강화도 일대를 돌면서 느낀 것은 병인양요가 강화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양헌수 장군에 대한 기념비들이 많으며 강화도를 이야기할 때 병인양요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안내문









 







아래는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기념물 제36호
소재지 : 길상면 온수리 산 42번지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르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에는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을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높이가 181cm, 비신의 높이가 163cm, 너비 60cm, 두께가 27cm이다.
 

 
승전비를 지나 조금 지나면 도착하면 전등사 윤장대를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는 월정사(월정사 윤장대)에서도 볼 수 있다. 월정사 나의 포스트에 사진을 올려놓았다. 형태는 거의 비슷하나 보관장소가 차이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 참조하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윤장대 안내문

















※ 전등사
안개낀 전등사는 매우 아름다웠다. 옥의 티라면 '조선일보를 규탄한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감상에 방해를 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나의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전경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등사 전경 2




아래 동영상은 전등사 풍경을 촬영한 것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삼랑성 안내문, 양헌수 승전비 안내문, 전등사 윤장대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문화재 > 강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傳燈寺) 2/2  (0) 2007.12.01
광성보(廣城堡) 3/3  (0) 2007.11.20
광성보(廣城堡) 2/3  (0) 2007.11.17
광성보(廣城堡) 1/3  (0) 2007.11.13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0) 2007.11.06
:
광성보(廣城堡)


광성보에 대한 마직막 포스트이다. 광성보 입구 바로 옆에서는 아래 그림과 같은 광성돈대가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돈대(廣城燉臺)

내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 자세한 설명을 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무튼 이곳은 당시 사용한 다양한 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사용한 포들일 것이다.
흙을 쌓아 만든 벽사이 사이에는 이러한 포를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곳곳에 나 있다.









아래는 광성돈대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광성돈대(廣城燉臺)

  광성돈대는 광성보(廣城堡)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肅宗) 5년(1679) 함경도(咸鏡道)·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砲座) 4개소와 포 3문(門)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돈대 안내문




아래는 광성돈대를 촬영한 것이다.







이 아래부터는 광성돈대에 전시된 포에 관한 내용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에서 본 불량기 모습

아래는 불량기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불랑기(佛狼機)
구경 : 26m/m
길이 : 78.2cm
중량 : 38kg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 개에서 아홉개의 자포(子砲)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랑기 안내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량기 정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랑기 측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에서 본 소포 모습

아래는 소포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소포(小砲)

구경 : 84m/m
길이 : 119cm
중량 : 171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화포중 가장 발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포 안내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포 정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포 측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이포 측면 1

아래는 홍이포에 관한 안내문을 옮긴 것이다.  
홍 이 포(紅夷砲)

구 경 : 100 mm 
길 이 : 215 cm 
중 량 : 1,800 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이포 정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이포 측면 2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광성돈대에 대한 안내문과 불랑기에 대한 안내문, 소포에 대한 안내문, 홍이포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문화재 > 강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傳燈寺) 2/2  (0) 2007.12.01
전등사(傳燈寺) 1/2  (0) 2007.12.01
광성보(廣城堡) 2/3  (0) 2007.11.17
광성보(廣城堡) 1/3  (0) 2007.11.13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0) 2007.11.06
:
광성보(廣城堡)


광성포대를 지나 조금 지나면 용두돈대가 나타난다. 쌓여진 성벽사이로 강화 앞바다가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용두돈대(龍頭墩臺)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닷물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서해바다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고 하고 넓은 지역에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빠진다고 하지만 사실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처음 바닷물이 이동하는 속도를 보니 강물이 흐르는 것으로 착각이 든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 참조한다.











아래는 용두돈대 안내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용두돈대(龍頭墩臺)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이 돈대는 강화해협(江華海峽)을 지키던 천연 요새(要塞)로서 조선 숙종(朝鮮 肅宗) 5년(1679)에 축조되었다. 병인(丙寅).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치열한 포격전(砲擊戰)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1977년 성벽(城璧)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江華 戰蹟地)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비의 전면(前面)의 글씨는 박정희 전대통령(朴正熙 前大統領)의 친필이며 후면의 비문은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용두돈대 안내문




성벽을 지나면서 몇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밖을 볼 수 있는 구멍이 나있는데 하나는 정면을 향하고, 하나는 아래를 향하여 구멍이 나왔다. 아마 이 구멍을 통해 적을 관찰하거나 총이나 화살을 쏘지 않았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면을 관측할 수 있는 형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벽 아래를 관측할 수 있는 형태


















성벽위에서 보는 해안가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해안가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로 성벽을 따라 가면 끝에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옆에 있는 '홍이포' 전시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옆에 있는 홍이포 전시물




광성보 입구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돌아오는 길




돌아오는 길에서 보는 광성보 입구 사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보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용두돈대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문화재 > 강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傳燈寺) 2/2  (0) 2007.12.01
전등사(傳燈寺) 1/2  (0) 2007.12.01
광성보(廣城堡) 3/3  (0) 2007.11.20
광성보(廣城堡) 1/3  (0) 2007.11.13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0) 2007.11.06
:
광성보(廣城堡)


광성보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진들과 이야기 때문에 3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광성보를 찾았을때 마침 안개가 끼어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보

잠깐이면 다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주변이 매우 넓어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살펴보아야만 했다.
광성보의 커다란 문을 지나 길을 따라가 보면 해안가로 둘려쌓여 보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종 목  사적 제 227호(성)
면 적  면적 6.1ha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조선 후기 신미양요가 이곳에서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보 성벽

  항상 아이들에게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가르치면서 과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왜 강화도에서 유난히 수많은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강화도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 이곳의 중요성을 우리 조상들은 옛부터 알고 수많은 포를 배치하고 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아래는 광성보 안내도를 옮겨놓은 것이다.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 227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한 강호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숙종 5년(1679)에 강호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이 보에 딸린 화도돈, 오두돈, 광성돈을 함께 축조하여 이를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 미국 군대와 48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 영령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을 1977년에 정비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보 안내문




아래 동영상은 광성보 입구 풍경을 촬영한 것이다.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면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장군과 59명을 기리기 위한 쌍충비가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쌍충비


 
 
 
 
 
 
 
 
 
 
 




아래는 쌍충비 안내문를 옮겨놓은 것이다.
쌍충비(雙忠碑)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호군 불은면 덕성리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1826-1871)순절비인데 폭이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쌍충비 안내문




쌍충비를 지나 용두돈대(龍頭墩臺)로 가는 길 중간에 광성포대가 나타나게 되는데 광성포대 역시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해안시설 중 하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포대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포대 내부

















아래는 광성포대 안내문를 옮겨놓은 것이다.
광 성 포 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호군 불은면 덕성리 산123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1675-1725)은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1874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성포대 안내문




아래 동영상은 광성포대를 촬영한 것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광성보에 대한 안내문, 쌍충비에 대한 안내문, 광성포대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문화재 > 강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傳燈寺) 2/2  (0) 2007.12.01
전등사(傳燈寺) 1/2  (0) 2007.12.01
광성보(廣城堡) 3/3  (0) 2007.11.20
광성보(廣城堡) 2/3  (0) 2007.11.17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0) 2007.11.06
:
초지진(草芝鎭)



강화도는 처음 가보는 곳이다. 섬이라 하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볼거리도 많았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중요한 강화도에 도착해서 처음 가본 곳이 바로 초지진이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초지진 주변에 전에는 거의 바다였지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되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지진 바깥 모습

또한 초지진은 강화도를 둘러싸고 있는 진들중에 일부이며 수많은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인상적인 것은 초지진 벽옆으로 소나무 2그루(옆의 사진에 보면 조금 보이는 소나무)가 있는데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고 우리 조상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곳이라 할 수 있다. 

종 목  사적 제225호(진)
면 적  면적 4,233㎡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아래는 초지진 안내도와 설명 자료를 옮겨놓은 것이다.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 225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朝鮮) 효종(孝宗)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그 뒤 고종(高宗) 3년(1866) 10월 천주교(天主敎)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로즈의 극동함대(極東艦隊)와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通商)을 강요하여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및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雲楊號)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진(激戰地)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및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사거리(射距離)도 짧고 정조준(正照準)도 잘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江華島修好條約)의 체결을 가져옴으로써 일본 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 진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簽節制使) 1일,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戰船) 3척이 주둔하였었다.
   이 곳은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기에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大砲)를 진열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지진 안내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지진 설명













 



초진진 밖에서 보는 모습으로 사이 사이에 적을 관찰하거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돌이 쌓이 모습으로 보아 제법 튼튼하게 쌓여 있는듯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지진 바깥 모습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지진 바깥 모습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지진 안의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의포 보관 장소



바로 위의 사진 건물 안에는 홍이포를 전시하여 놓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이포 측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이포 전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이포 후면

아래는 홍이포에 관한 안내문을 옮긴 것이다.  
홍 이 포(紅夷砲)

구 경 : 100 mm 
길 이 : 215 cm 
중 량 : 1,800 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아쉬운 점은 그 당시 우리가 사용하던 포탄이 폭발하지 못하는 종류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임진왜란때 적군의 배에 구멍을 내어 침몰시킬 수는 있었어도 그 당시 쇠로 만들었던 함선에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초지진에 대한 안내문과 홍이포에 대한 안내문 원본 및 나의 경험

'문화재 > 강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傳燈寺) 2/2  (0) 2007.12.01
전등사(傳燈寺) 1/2  (0) 2007.12.01
광성보(廣城堡) 3/3  (0) 2007.11.20
광성보(廣城堡) 2/3  (0) 2007.11.17
광성보(廣城堡) 1/3  (0) 2007.11.13
:

BLOG main image
제가 알고 있는 컴퓨터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S/W, H/W)를 소개합니다. 웹 2.0의 환경적 특징에 관심이 많으며 많은 분들과 공유를 원합니다. by 네임펜 선생님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1)
프로필 (0)
구글 (6)
스마트교육 (15)
웹 2.0 (14)
교수·학습 활동 (4)
리눅스 (16)
윈도우 (13)
윈도우 활용하기 (7)
프로그램 활용 (14)
사진 모음 (0)
내가 읽은 책 (0)
문화재 (15)
평창군 (9)
강화도 (6)
여행 (3)
일상의 기록 (3)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달력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