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사고지(五臺山 史庫址)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목에 왼쪽으로 아주 작은 산길이 나 있다. 차량은 1대 가량 통과할 수 있으며 올라가기 직전 작은 공간이 있는데 3∼4정도는 주차가 가능하다.
경사가 무척이나 급하지만 운동 삼아 쉬엄쉬엄 올라가면 숲으로 둘려쌓인 길이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은 듯 매우 한적하여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도 들기도 한다.
한참을 올라가다면 사고지(史庫地)가 나오는데 생각보다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동차 한대 정도 지날 수 있는 크기의 길로 주변에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자라 있다. 보통 문화재가 가는 길과 느낌이 틀리며 여러 관찰을 하면서 갈 수 있다.
오대산 사고지는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것으로 1992년 복원된 것이다.
아래는 오대산 사고지의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아래는 동영상으로 보는 오대산 사고지 풍경이다.
오대산 사고지 1
경사가 무척이나 급하지만 운동 삼아 쉬엄쉬엄 올라가면 숲으로 둘려쌓인 길이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은 듯 매우 한적하여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도 들기도 한다.
한참을 올라가다면 사고지(史庫地)가 나오는데 생각보다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종목 | 사적 제37호 |
면적 | 827㎡ |
소재지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
시대 | 조선시대 |
자동차 한대 정도 지날 수 있는 크기의 길로 주변에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자라 있다. 보통 문화재가 가는 길과 느낌이 틀리며 여러 관찰을 하면서 갈 수 있다.
오대산 사고지 가는 길
오대산 사고지는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것으로 1992년 복원된 것이다.
아래는 오대산 사고지의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 역사서인「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朝鮮王室)의 족보(族譜)인「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관하던 사고(史庫)가 있던 자리이다. 오대산 사고는 1606년(선조 39)에 이 곳이 물·불·바람의 재화(災禍)를 막을 수 있는 길지(吉地)라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역사서를 보관하기 적절한 곳이라 하여 건립되었다.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 등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모두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92년에 남아있는 자료를 통하여 복원된 것이다. 부근에는 역사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사고사(史庫寺)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초기에 춘추관(春秋管)·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에 1부씩 보관되었으나 임진왜란[1592년] 때 전주실록만 내장산(內裝山)으로 옮겨져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버렸다. 1606년(선조 39) 3부가 다시 제작되어 춘추관·태백산(太白山)묘향산에 보관되었고, 전주본은 강화 마니산(摩尼山)에 그리고 교정본(校訂本)본은 이 곳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그 후 병자호란(1636)과 이괄의 난(李适의 亂, 1624)으로 인하여 춘추관본·마니산본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므로, 다시 4부의 실록이 작성되어 강화도 정족산(鼎足山)·태백산·무주 적상산(茂朱 赤裳山)·오대산에 1부씩 보관되었다. 오대산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으로 옮겨져 1924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때 거의 불타 버렸다. |
사고지 안내판
오대산 사고지 2
오대산 사고지 3
아래는 동영상으로 보는 오대산 사고지 풍경이다.
- 사진출처 : 본인 사진
- 글 출처 : 오대산 사고지 안내문 및 안내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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